욕지도

한려수도의 끝자락에 별처럼 흩어진 39개의 섬을 아우르는 욕지면의 본섬으로

면적이 14.5km2에 해안선의 길이가 31km, 최고봉은 천왕봉(392m)이다.

통영을 한국의 나폴리라고 부르는 이유는 천혜의 항구이자 다도해의 많은 섬으로 가는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통영을 대표하는 섬 욕지도는 통영 중화항에서 21km, 뱃길로 50분쯤 걸린다. 통영에서 남쪽으로 달리면 크고 작은 섬들이 즐비한 국도, 연화도, 노대도, 두미도 등과 함께 연화열도의 욕지면을 대표하는 섬을 만나게 된다. 연화열도의 맏형인 욕지도는 남쪽 끝 먼바다에서 거친 풍랑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는 고마운 섬이다.

욕지도 동항은 연화도, 우도, 노대도, 내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어 호수처럼 잔잔하다. 그중 욕지도 여행의 매력은 지도 한 장 들고 섬 곳곳의 비경을 찾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21㎞ 길이의 해안도로를 따라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또 다른 상쾌함이 달려오고,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산행로를 트레킹 하다 보면 사진으로는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는, 숨어 있던 비경을 발견하실 수 있습니다.

  • 욕지도 출렁다리

  • 욕지도 페리칸바위

  • 욕지도 새천년 기념탑

욕지도의 유래

최근에 이곳 욕지도 동항리에서 선사시대의 조개더미 유적들이 연이어 발굴된 이래, 한반도 남해안 도서지역 석기시대의 성립과 더불어 해양을 통한 고대문화의 전파경로 및 교류의 성격 규명을 위해 고고학계가 주목하고 있다.
옛날 호주판관(湖州判官)의 도읍 터였다는 전래의 속설과 더불어 삼국시대를 비롯한 고려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 등이 그동안 간간이 출토되었으며, 그 후 고려 말 왜구의 극심한 노략질로 황폐화되자 한때 일본 대마도의 어선들이 이곳 황금 어장에 상주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직후, 이 고장에 삼도수군통제영이 설치되면서 이곳 해역은 통제영에 속한 사량진(蛇梁鎭), 당포진(唐浦鎭), 삼천진(三千鎭) 등의 변방 수색 및 초계 정박처가 되었다. 매년 여름철이면 통제영 수군들이 사슴을 수렵하여 그 녹용을 진공품으로 조정에 올렸으며, 한말에는 통제영 소속이던 욕지도가 왕실 궁내부의 명례궁(明禮宮) 소속으로 잠시 직속되기도 하였다.

‘고려사’에 보면 우왕 4년(1378년) 8월 “배극렴이 욕지도에서 왜적을 물리치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1409년) 7월 15일 기록에도 욕지도란 지명이 등장함은 그만큼 오래됐다는 뜻이다.
욕지도에는 고려 말까지 주민들이 살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삼별초 연계와 왜구들의 노략질 때문에 공도(空 島)정책을 실시하여 주민들이 육지로 대거 이주하였다. 욕지도에 공식적인 입도가 재허락된 것은 1887년(고종 24년) 조선시대 말엽이다.
1889년 개척자들이 처음 섬에 들어왔을 때 수목이 울창하고 가시덤불과 온갖 약초가 뒤엉킨 골짜기마다 사슴들이 뛰어다녔다 하여 ‘녹도(鹿島)’라고도 불렀다 한다.
욕지항 안에 또 하나의 작은 섬이 거북이 모양으로 목욕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하여 욕지라 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유배지였기 때문에 많은 인물들이 이곳에서 욕된 삶을 살다 갔다 해서 욕지라 일컬었다고도 한다. 다른 설은 ‘생(生)을 알고자(欲智) 한다’는 화엄경의 구절에서 유래한 불교지명이라는 등 여러 지명유래설이 있다.

1973년도에는 1,376가구 8,101명, 초등학교 1,560명, 중학교 456명이었다. 1970년대까지는 남해안의 유명한 어업전진기지 역할을 하였으나, 최근에는 욕지도를 관광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행정구역상 중세기 이래 고성현에 속하였고, 1900년 진남군 원삼면(遠 三 面)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1909년 용남군(龍南郡) 원삼면, 1914년 통영군 원량면(遠梁面)으로 편입되었다가 1955년 통영군 욕지면에 속했다. 1995년에는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합되면서 통영시 욕지면에 편입됐다.